남녀가 부부관계를 맺는 행위를 결혼 혹은 혼인이라고 한다. 혼인은 국가나 종교 기관에 등록하는 절차를 통해, 법적 사회적으로 공인받을 때 완성된다.이는 혼인이 남녀의 단순한 성적 결합이 아닌, 당사자의 성적, 심리적, 경제적인 결합을 뜻하는 중요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의 기초적 구성단위인 가정, 가족을 형성하는 단초가 되며, 나아가서는 종족보전의 주요기능을 가지기 때문이다.따라서 모든 사회가 어떤 형태로든 혼인을 승인하고 이에 따른 법적 규제를 마련해왔다. 그러나 그 형태는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 및 각 사회의 경제적, 종교적, 민족적 요소에 따라 다르다.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L.H 모건은 『고대사회』(1877)라는 책을 통해 최초로 인간의 혼인 제도의 변천을 과학적으로 밝혔다. 모건은 난혼과 집단혼에서 혈연가족과 푸날루아가족, 그리고 대우혼을 거쳐, 오늘날의 일부일처제로 변천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을 바탕으로 혼인의 역사와 거주규제에 따른 혼인 형태를 짚어보기로 한다.
난혼이란 남녀 성관계에 대한 규제나 혼인제도가 없어 성관계가 완전히 자유스런 상태를 뜻한다. 집단혼은 군혼이라고도 하는데, 2명 이상으로 된 남자 1조(組)와 다른 1조의 여자들이 동시에 혼인 관계에 있는 혼인 형태를 말한다. 이는 원시사회에서는 무리내의 남자 전체와 여자 전체가 성관계를 맺었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인류도 동물사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에서 나온 주장이다. 돌도끼를 들고 다니며 수렵과 채집에 의존했던 원시인사회는 동물사회와 다르지 않았다. 한 마디로 본능이 지배하는 사회였고, "사랑" "가족" "결혼" 등의 관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성관계 역시 "종족보존"이란 본능을 충족시키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난혼이나 집단혼을 부정하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원시시대부터 남녀가 일대일로 쌍을 이루는 대우관계가 존재했고, 다만 부부만이 성을 독점하지 않고 무리내의 성원에게 개방되어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동물들의 생태 연구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원앙이나 기러기 등의 조류는 한 마리의 상대와 한평생을 산다. 야생원숭이나 유인원 무리는 일정 기간의 배타적 성관계와 가족적 형태를 이루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모건은 집단혼 이후 혈연가족으로 나아갔다고 주장했다. 혈연가족이란 혼인집단이 세대별로 분화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집단내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는 자녀 세대의 모든 부모가 되어,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세대간 성행위가 금지된 형태를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모와 자녀의 성관계뿐만 아니라,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푸날루아' 혼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 푸날루아란 '친근한 동료 동반자'란 뜻으로 하와이 원주민의 언어이다.
모건이 만난 하와이의 한 원주민 종족은 가족의 모든 자매들이 공동의 남편에 공동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는 그들의 공동의 남편에서 배제되었다. 남자들은 다른 가족에서 자신의 아내를 만났고, 다른 가족 출신의 남편들은 서로를 푸날루아 즉, 친근한 동료 혹은 동반자라고 불렀다.
친자매 형제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푸날루아 가족의 규율은 사촌형제 자매간으로 사촌자매형제간에서 먼 촌수의 방계친족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방대한 규모에서의 성관계가 금지되는 집단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씨족이다. 씨족이 형성되고 혈족간의 혼인이 금지되면서 대우 관계가 분명한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혼인할 수 있는 집단범위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급기야 푸날루아혼을 누르고 대우혼이 보편적인 형태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수렵과 채집이 주된 경제활동이었던 원시시대 초기에는 같은 무리내에서 혼인하였다. 따라서 혼사(婚舍)가 어디인가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사가 시작되고, 씨족내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어 타씨족에서 배우자를 맞이하게 되자, 혼사(婚舍)를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시 되었다.
농사가 시작되었던 시기, 농사의 주요 담당자는 여성이었다. 채집과 수렵의 유습은 남아 있었고, 채집은 여전히 여성이, 수렵은 남성이 담당하였다. 수렵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농사와 채집이 식량을 공급하는 주된 원천이었다. 때문에 집단내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으므로, 자식은 어머니 씨족에 소속되었다. 한마디로 여성을 중심으로 가족이 편제되는 모계사회였다. 남성들은 아내의 씨족에 마련된 혼사(婚舍)에서 살거나, 밤에 찾아들곤 했다. 사위를 처가로 데려오는 처가거주혼(妻家擧主婚)의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처가거주혼의 유습은 지금도 발견되는데, 바로 "데릴사위제"이다.
씨족이 형성되고 혈족간의 혼인이 금지되면서 대우 관계가 분명한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혼인할 수 있는 집단범위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급기야 푸날루아혼을 누르고 대우혼이 보편적인 형태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수렵과 채집이 주된 경제활동이었던 원시시대 초기에는 같은 무리내에서 혼인하였다. 따라서 혼사(婚舍)가 어디인가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사가 시작되고, 씨족내에서의 혼인이 금지되어 타씨족에서 배우자를 맞이하게 되자, 혼사(婚舍)를 어디에 둘 것인가가 문제시 되었다.
농사가 시작되었던 시기, 농사의 주요 담당자는 여성이었다. 채집과 수렵의 유습은 남아 있었고, 채집은 여전히 여성이, 수렵은 남성이 담당하였다. 수렵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농사와 채집이 식량을 공급하는 주된 원천이었다. 때문에 집단내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으므로, 자식은 어머니 씨족에 소속되었다. 한마디로 여성을 중심으로 가족이 편제되는 모계사회였다. 남성들은 아내의 씨족에 마련된 혼사(婚舍)에서 살거나, 밤에 찾아들곤 했다. 사위를 처가로 데려오는 처가거주혼(妻家擧主婚)의 관습이 생겨난 것이다. 처가거주혼의 유습은 지금도 발견되는데, 바로 "데릴사위제"이다.
농경과 목축의 결합하고 농사도구가 발달되면서, 농사는 더 이상 여성의 몫으로만 남아 있지 않았다. 가축을 다루고, 땅을 깊게 가는 일은 여성보다 남성이 더 적합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씨족내의 경제활동은 점차 남성 위주로 재편되게 되었다. 더구나 농경과 목축의 결합과 농기구의 발달로 인해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였다. 이젠 먹고 남은 것을 누가 '소유'하게 되는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고, 당연히 생산에서 주된 역할을 하는 자, 즉 남성이 잉여생산물을 소유하게 되면서 남성의 힘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모계사회는 점차 부계사회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혼인 형태도 변모하게 된다.
모계사회에서는 부부사이의 자식은 아내의 씨족에 편성되었으므로, 부자(父子)는 서로 다른 씨족이었다. 따라서 부자 사이에는 재산을 상속할 수 없었고, 아버지의 재산은 아버지 자매의 아들에게 상속되었다.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서는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 집에 머무르게 한 뒤 아버지 자매의 딸과 혼인시키켜야 했다. 이것이 관습화되면서 처가거주제는 남가가주제로 변화되었고, 점차 부계상속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가족질서는 남성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부계사회로 완전 이행한 것이다.
부계상속제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가'가 명확해 질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에게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는 성관계를 하지 말 것, 즉 정절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처럼 유전자를 분석해 누구의 아이인가를 밝힐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요구였다. 반대로 여성은 정절의 의무를 지는 대신 자신의 정처(正妻)로서의 지위와 자신이 낳은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도록 요구했다. 그것은 점차 법제화되었고, 일부일처제는 정착되었다.
물론 왕이나 부자들은 수많은 처첩을 거느렸다. 그러나 이는 부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현상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