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개혁협의회



강성욱
잠들어 있는 아들, 의현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유치원에서 가져온 그림 스크랩에는 아이의 생각이 많이 담겨 있었다. 신나서 그림들을 설명해 주는 아이의 모습에 대견함을 느끼며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세 번의 유산 후에 천사처럼 다가와 나머지 한틀을 차지하므로 행복한 가정을 완성시켜준 아이였다. 아내의 회식은 오늘 조금 길어지나 보다. 쌀을 안치고 미역국을 끓이며 우리들의 첫출발을 흐믓한 마음으로 떠 올려 보았다. 1990년 초임지 학교에서 4년째되던 해 아내가 부임하여 왔다. 시골 6학급에서 처녀,총각교사의 사랑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잔잔하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지냈던 2년의 연애기간을 끝내고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였다.
전남 해남의 바닷가 출신인 나와 경기도 양평 산골짜기에서 자란 아내는 둘 다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운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둘 다 일찍 아버님을 여의였던 공통점과 가정의 경제적인 면에서는 내세울 것이 없었다.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무르익고 인사차 간 처가댁(?)에 결혼식에 관한 일체의 것들을 일임받았다. 물론 아내와 상의하여 합의를 보았고 아내의 전폭적인 지지가 뒤따랐지만 산골짜기 동네에서 유일하게 대학생을 배출했던 처갓집 식구들에게 나의 생각을 전적으로 따라 주길 바라는 것은 조금은 무리였다. 결혼식 장소에 관한 문제였다.

초임발령을 받고 6년째 근무한 학교는 무한한 열정을 쏟았던 잊지 못할 곳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혼만큼은 꼭 학교 강당에서 하고 싶었다. 결혼식 장소를 학교로 정하고 나서 구체적으로 결혼에 들어갈 비용을 생각해 보았다. 작은 공장을 경영했던 형님의 사업이 원활하지 못한 관계로 봉급의 거의 전부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6년의 직장 생활에 300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결혼하겠다는 말씀에 걱정부터 하셨던 어머님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른다.

2년 전 결혼 약속으로 중소도시로 전근간 아내는 알뜰하게 저축하여 1100만원 하는 반지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신혼살림은 아내의 반지하에서 하기로 하고 서로가 쓰고 있던 물건을 하나로 합쳤다. 아내의 텔레비젼과 1인용 침대, 대학 때 장만했던 낡은 내 전축과 500여권의 책은 신혼살림의 가장 빛나는 것들이었다. 300만원의 결혼 예산 중 200만원을 아내에게 주어 가장 간단한 예물과 혼수(?)를 준비하게 하였다. 나머지 100만원으로 손님을 치를 기본적인 음식장만과 차량 운행비용으로 형님께 드렸다. 이런 저런 준비과정을 거치는 사이 결혼식이 다가왔다.

토요일 수업을 끝내고 식장 꾸미는 일에 교장 선생님 이하 동료 교사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졸업식때 사용하기 위해 2개의 교실을 틀 수 있도록 만든 5-6학년 교실을 식장으로 꾸몄다. 붓글씨를 잘 쓴 강선생님은 신랑, 신부 이름을 써서 학교 안내판에 붙였고, 유치원 정선생님은 부케를 멋있게 만들어 주었다. 입장할 때 밟고 들어오는 카페트는 면소재지 철물점에서 부직포를 사서 해결하였는데 결혼식이 끝난 후 아이들의 붓글씨용 받침대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의자로 하객들이 앉을 의자를 마련하였고 교장선생님께서는 지역 교육장님을 주례로 모셔 주셨다.

결혼식 당일 아침 일찍 미진한 식장을 손보고 있을 때 일찍 결혼식에 오신 한 할머니께서 여기가 결혼식하는 장소냐고 물어보셔서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망치를 들고 식장을 정리했던 내가 그 결혼식의 당사자인 것을 보시고 많이 놀래셨단다. 아내의 이모할머니이신 그 분은 요즘에도 그때의 상황을 재미있게 회상하신다.

결혼식 날 우리는 턱시도나 웨딩드레스가 아닌 한복을 예복으로 입었는데 장모님은 종종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의 모습을 생각하며 아쉬워하신다. 결혼식은 동네 축제가 되어버렸다. 지역에서 함께 근무하는 선생님들의 축가가 울려퍼지고 교실 창문에는 동네분들과 동네 조기 축구회 회원들이 수업을 훔쳐보는 것처럼 흘끔 거렸고 작은 의자에는 6년간의 걸친 내 제자와 2년간에 걸친 아내의 제자들로 가득차 특이한 결혼식에 축하를 보내 주었다. 식이 끝나고 학교 식당에서는 누님의 친구분들과 어머니회 회원분들께서 유치원 아이들 부터 초, 중,고등학생 그리고 많은 하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미 고등학생이 된 나의 첫 제자들은 음식을 나르는 일을 도맡아 해 주었다. 부산한 결혼식이 끝나고 친
구의 낡은 봉고차에 몸을 싣고 새로운 삶의 여정에 올랐다.

정확히 10년이 지난 결혼식.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옛날 혼례와 오늘날의 혼례를 비교하는 내용에 우리 결혼식은 훌륭한 교재가 된다. 아이들은 이 결혼식이 오늘날의 결혼식인지 옛날 결혼식인지 많이 헷갈려 하지만 참 재미있어 한다. 최근에 모 방송국의 프로그램 중 혼수문제로 아내를 구타하고 괴롭히는 것을 보고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 요즘 배우자 선택에 있어 그 척도가 진실된 사랑보다는 경제력을 최우선으로 꼽는다는 조사를 접하면서 물질 만능주의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택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참으로 행운아인지도 모른다. 작은 매형의 사업 실패로 생활고를 겪고 있는 누님에게 자기의 결혼 예물인 금반지와 금목걸이를 팔아 작은 돈이라도 쥐어줄 주 아는 아내의 마음씨, 결혼 보름 만에 폭우가 쏟아지는 용문산 골짜기에서 뒷정리를 하고 손을 씻다 빠져나간 결혼반지 때문에 조마조마한 나를 안심시켜준 아내, 이제는 고장나 서랍 한켠에 놓여져 있는 결혼예물시계. 그 때의 흔적들이 부주의함으로 인해 하나 둘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우리들이 밟고 입장했던 그 부직포를 받침으로 ''우리 나라'' ''정직''을 써 내려갔던 아이들의 힘찬 붓글씨처럼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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