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개혁협의회



이선애
▶다음의 글은 2002년에 생개협에서 주관한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혼인준비교실' 이벤트 당선작입니다◀


제가 결혼을 약속한 사람은 현재 간경변증을 앓고 있습니다.
만성 간염에서 비롯된 간경변으로 젊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야말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나이가 젊기에 나이가 드셔서 발병한 분들보다는 예후가 좋을 수 있고, 현재 조금 나아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갑자기 어떻게 된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요. 그러나 배우자가 될 그 사람은 가정형편도 결코 좋지 않고 특히 병의 특성 때문에 직업을 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아 경제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닦지 못하였답니다. 그래서 그동안 만족할 만한 병원 치료도, 좋다는 신약도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구요.

다행히 얼마전 정말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그 분의 배려 덕분에 현재 좀더 좋은 상태를 위해 나흘에서 일주일 가량 진단을 다시 받고, 만약 치료가 급하다면 좀더 큰 병원에서의 치료도 고려해보고 있는 중이랍니다.
하지만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꼭 결혼을 해서 반드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가 착한 여자로 보이실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답니다. 전 그 사람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거든요. 채무관계가 아닌 사랑의 빚말이죠. 오직 사랑으로만 갚을 수 있는…

이런 기회를 계기로 여러분께 제가 그이와 결혼하려는 이유를 부족하나마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배우자가 될 그이가 저와 결혼하려는 이유도 함께 말씀 드리구요. 결혼에 대한 저희의 생각 중에서 공통점과 차이점, 결혼에 대한 공통적인 목표도 아울러 말씀 드리겠습니다.

먼저, 제가 그이와 결혼하려는 이유는 현재 이 사람이 시한부 생명이기에, 저희의 사랑을 나누며 교감할 수 있는 1분 1초의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간절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가 늘 옆에서 지켜보며 건강상의 변화를 수시로 관찰해야 하기에 저흰 결혼하면, 떨어져 있고 싶어도 떨어져 있지 못하고 아마 늘 붙어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집에서 살면서 이 사람의 건강상태에 맞는 식단을 짜서 장을 보고, 건강에 좋다는 현미잡곡밥을 짓고 상을 차리고, 직접 수액을 맞춰주기 위해 아픈 마음을 뒤로하고 그이의 마른 손등 위에 바늘을 꽂아주어야 하겠지요. 또 시간이 지나 이 사람이 더 많이 아플 때에는 밤을 새워 간호를 하고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눈물로 지켜봐야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현재의 제겐 그것마저도 행복입니다. 그이가 곁에 살아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제겐 너무나 감사한 일인걸요. 하지만 그 사람의 병이 좋아져서 기적처럼 다시 건강을 회복한다면 정말 저는 어떤 댓가라도 치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 사람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큰지 너무 잘 알고있는 저이기에 늘 이렇게 기도를 한답니다.
참, 제 배우자가 될 그 사람에게 왜 저와 결혼하려고 하느냐고 넌지시 한 번 물어보았거든요. 그랬더니 그 사람은 그냥 운명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늘 제게 미안함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하는 착한 그이 이기에 더 이상은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목이 매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이가 이런 병에 걸려있단 사실을 저희 둘다 몰랐습니다. 사귄지 몇년 후에 다른 질환 발견을 위한 건강 검진을 받던 중 우연히 발병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도 그때서야 그이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전까진 저희도 다른 커플들처럼 싸우기도 하고 서로 미워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무엇보다 제 좁은 속과 다소 완벽주의에 가까운 못난 성격 때문에 그 사람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이는 그래도 늘 용서해주고 이해해주며 절 사랑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 사랑의 빚을 많이 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가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저와 그이의 결혼에 대한 공통적인 생각은 역시 1분 1초 날마다 숨쉬는 매순간마다 곁에서 함께 모든 것을 나누자는 데에 있었습니다.

희망과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아픔과 절망은 나누어 반이 되듯 또 쌀을 아무리 잘 씻어 물에 불려 놓아도 밥통에 넣어 가열을 하지 않으면 밥이 되지 않듯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어도 결혼이란 마음을 담은 틀에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랑을 만들어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밥통속에서 아무리 뜨겁더라도 맛있는 밥이 되려면 참아야 되듯이, 결혼 생활속에서 생기는 뜨거운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야만 ‘맛있는 사랑의 밥’을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저희는 배우자 한쪽이 아픈 경우라서 다른 분들과는 경우가 좀 다르겠지만, 앞서 말씀드린 점들은 여러분에게도 보편적으로 공감이 되는 내용일 듯 싶네요.

그리고 저와 그이의 결혼에 대한 시각의 차이점은 전 결혼 후에도 여자가 맞벌이를 하며 경제활동을 해도 좋다는 생각인데 반해, 그 사람은 반대하는 입장이랍니다.
물론 그 사람은 아파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제가 과외를 해야 하지만요. 그 사람은 만약 자신이 건강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다면 자기의 수입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인에겐 절대 일을 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돈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의 남녀 역할을 지키는 것이 다소 진부해 보일 순 있지만, 따뜻하고 편안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내가 집안 살림을 꾸려 가는 것이 부부에게나 장래 태어날 아이들에게나 좋을 거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와 배우자될 사람이 결혼 생활을 하며 지키고픈 공통적인 목표는 후회없는 삶을 위한 최고의 선택을 한 만큼 ‘후회없이 진실하게 하나가 되자’라는 것입니다.
즉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언제 끝이 날지 모르지만 마감하는 그 날까지 한마음 한뜻으로 후회없이 서로를 아껴주고, 고통을 품어주며, 몸과 마음의 건강과 행복을 돌봐주자는 의미로, 말 그대로 ‘結魂’(혼이 하나가 된다)이란 뜻을 그대로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닌 누추하고, 초라한 모습, 아프고 병든 모습을 더 안쓰럽게 여기고 보살피며 희망의 말 한마디를 늘 건넬 줄 알고, 배우자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꽃 한송이를 사기 위해 화장품 값을 아끼고 책 한 권을 덜 사겠다는 결심을 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제게 고통을 숨기려 억지로 안 아픈 척 웃음을 보이겠지요. 아픈 몸으로도 늘 마음속으로 저의 행복을 기도 드리겠지요.
또 저는 잠든 그 사람의 머리맡에서 기적같은 건강 회복을 늘 기도드리며 시간 맞춰 약을 챙기겠지요. 그이에겐 짬짬이 번 돈을 모아서나마 늘 든든한 아내가 되어 지켜주겠다는 자신감을 보여주려 애쓸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은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차라리 대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행복하게 감내하며 받아들였을 그 고통들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마음이란…

저는 이제 그 고통을 결혼과 동시에 얻은 인생의 풀무불이라 여길 것입니다. 순도 99.9%의 순금을 얻기 위해서라면 꼭 거쳐야 하는 뜨거운 풀무불의 과정처럼 아픔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나면, 더욱더 아름다운 진정한 사랑을 그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아내’라는 이름으로 키워갈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아프지 않았다면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고, 느끼지 못했을 순간순간의 사랑에 감사하며 온몸과 영혼의 촉각을 곤두세워 느끼고 전하면서 행복의 웃음을 웃을 그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풀무불에서 금이 연마되듯 고통과 아픔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저희의 사랑도 더욱더 진실하게, 더욱더 간절하게, 더욱더 행복하게 열매 맺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희의 기도대로, 지금 제가 그 사람을 위해 쓰고있는 병상일지의 눈물로 젖은 몇몇 페이지도 완전히 마를 날이 오겠지요. 그 때가 되면 지금은 비록 어렵고 고단하게만 보이는 우리의 결혼이 후회없는 선택이었음을 기뻐하며 걱정만 끼쳐드린 부모님들께도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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