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개혁협의회



아름다운 만남

혼인,어제와 오늘

1) 전통 혼례의 원형

전통 혼례에 대한 초기적 자료로 원시 부족국가의 하나인 동옥저의 민며느리제가 있다. 민며느리제는 동옥저에서 여자의 나이가 10세가 되면 혼인을 약속하고, 혼약이 이루어지면 신랑집에서 신부를 대려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생활하며, 신부가 성인이 되면 다시 본가로 가고, 이때 신부집에서 신랑집에 폐백을 요구하고, 신랑이 요구대로 폐백을 받치고 신부를 데리고 오며, 그 때 비로소 혼인이 완전히 성립되는 형식이다(김종오, 1981).

반면 삼국 시대로부터 고려말에 朱子學이 전래되어 朱子家禮의 영향을 받기 전까지 고대 국가의 婚俗은 초서혼(招壻婚)이 지배적이었다. 초서혼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장가가서 자식을 낳고 살다가 처자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가는 형식으로 20세기초까지도 혼례식을 신부집에서 하고 신부집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처가와 本家를 왕래하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 존속되어 왔다.

고려의 혼인은 고구려의 혼인 형태에서 파급된 서입식혼인( 入式婚姻)이며, 혼인의 절차 없이 남녀가 스스로 중매하고 허락하였다. 이는 당시의 외래문화의 영향도 있지만 경제적 요인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의 혼인 의례 관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남녀가 서로 혼인하기로 합의하면 우선 남자가 여자의 부모에게 정중한 태도로 청혼을 하고, 여자의 집에서 부모가 혼인을 허락하면 남자는 여자 집에서 혼인 의례를 올린다. 신랑집에서 보내 온 돼지와 술로 신부집에서는 잔치를 베풀었으며 이 축하 잔치가 혼례 의식의 중심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풍속은 대개 삼국 시대로부터 고려조 이후까지 성행한 듯 하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혼례가 신부집에서 축하잔치로 행해지는 것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의 오랜 관행이었으며, 이것은 중국의 혼례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2) 조선시대의 혼례

고려말에서 조선 초까지는 王家와 사대부 계층이 중국의 「朱子家禮」를 기본으로 六禮의 준칙을 혼례의 이상형으로 삼았고 대부분의 서민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민속 관행의 혼례를 행하였다.

1) 친영혼례(親迎婚禮)의 규범

조선시대의 혼인 절차는 六禮(納采, 問名, 納吉, 納徵, 請期, 親迎)를 중히 여겨 왔으나, 중종 이후부터 유교를 생활 규범에까지 적용시키는 개혁을 하였고 이에 四禮의 절차에 따라 혼례를 행하였다. 四禮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으로 한국 혼례 절차의 이상형이며 양반 계층에서는 그대로 실행하려고 노력했던 규범이다. 이 가운데 四禮의 마지막 절차인 親迎이라는 의식은 신랑이 신부집에 와서 신부를 데리고 본가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혼속이었던 서류부가혼은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것임에 반해 친영은 혼례를 신랑집에서 치른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주자가례」에 의한 혼례가 민간 서민층에서 일반적으로 실행되어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2) 반친영혼례(半親迎婚禮)의 규범

16세기에 서화담 선생의 주장에 의해 전통혼속과 朱子四禮를 절충하여 삼일대반(三日對飯)이라는 반친영의례가 보급되었다. 반친영은 일부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16세기경부터 행하기 시작하여 일반 서민에게 보급된 것은 18세기경으로 추측된다. 반친영이란, 예식은 신부집에서 하되 신부집에 머무는 기간을 단축하여 삼일만에 신랑집으로 가서 친영의례를 거행하도록 하는 의례이다. 반친영혼례는 혼담, 사성, 택일, 함, 초행길과 대례, 마지막으로 대례를 치른 후의 의례로서 신행, 현구고례, 근친의 절차에 따르는 것이다.
이처럼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신랑집으로 가는 관습은 고대로부터 20세기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 갑오경장 이후

갑오경장 이후 개화기를 거치면서 개항과 함께 서구의 문화와 개신교가 들어와 혼례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전통 혼례의 틀이 구식 혼례로 밀려나면서 이른바 신식 혼례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일본과 서구의 혼례 요소가 19세기 중반까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부터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서양식의 혼례가 시작되었으며, 기록에 의한 최신식 혼인은 1890년 정동 교회에서 올린 여신도 박신실과 남신도 강신성의 혼인식이었다(이효재, 1972).

이 시기에는 교육 기회의 확대로 인하여 지식층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신식 혼인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1907년 기독교식 혼례가 처음으로 공개된 이후, 기독교인들이 신식 혼례를 하기 시작했고, 불교계에서도 전통 혼례가 아닌 불교식 혼례를 창안하였다. 이에 따라 혼례의 장소도 신랑·신부집이 아닌 교회, 절, 학교 등으로 변하면서 혼례식의 유형도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신식 혼례는 전통 양식보다 간략한 절차, 간단한 의복, 적은 비용으로 치를 수 있었으므로 다수에 의해 환영을 받게 되었다.

2) 1920년대 - 1960년

1920년대에는 여인들의 쓰개치마가 없어지고 단발머리형이 나타났으며, 신식 혼례의 물품 대여 장소가 생겨났고 여기서 신부의 면사포와 신랑의 모닝코우트나 프록코트를 대여해 주었다. 또한 1930년대부터는 양장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하여 신부 의상으로 웨딩드레스가 등장한다. 이시기는 전통 혼례복과 서양식 혼례복이 혼용된 과도기적 시기이다.(한상숙, 1984). 일제 통치 기간을 통하여 혼례 변천사에 있어서의 중요한 사건은 1934년 조선 총독부가 발표한<의례준칙>이다.

결과적으로 구식 혼례는 밀려나고 일본과 서구의 혼합인 신식 혼례가 거행되었다(박혜인, 1991).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오히려 고유한 민속 관행 속에 「가례」를 융합시켜 재래의 혼인 관행을 지속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김영주, 1994).

1950년대에는 6.25 사변의 영향으로 평상복 차림의 혼례식이 있었으나 휴전 직후부터 신식 혼례식이 일반화되었고, 1950년대 말에는 예식장 및 미용실에서도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대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혼례복으로 신랑은 신사복이 등장하여 모닝코우트와 병용되었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여성 혼례복은 흰색의 한복 치마와 저고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나라는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로 인해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사회가 복잡, 다원화됨에 따라 혼례 절차나 규범이 실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개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69년 국가 시책으로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1973년 가정의례준칙이 확정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준칙은 유명무실화되었고 일부 계층에서는 탈법, 변칙으로 호화스런 혼례를 계속하였다.

1) 경제 도약기(1961-1970)

1960년을 전후로 하여 약혼식이 등장하였다. 약혼식이란 집안과 당사자간에 언약하는 것이므로 대외적으로 크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당사자에 따라 약혼식을 생략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생략하기가 섭섭하면 신부집에서 양가가 자리를 같이하는 정도로 끝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서양식 혼인이 일반화되면서 예물도 노리개나 금반지보다는 다이아몬드 같은 서구식 예물에 관심이 증대되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예식장을 이용하였으며 예식장에서 신부 화장과 드레스를 끼워서 서비스하는 행태도 이때가 시초였다. 예식장에서 혼인을 하면서 폐백도 시댁이 아닌 예식장에서 간단하게 행해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관행을 변화시켰다기보다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장소만 변경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 결혼 선물이라면 의레 생각하는 것이 '다이아먼드'. 가격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쓰이는 3부짜리가 7만 9천원, 3.5부가 8만 8천원, 링은 대부분이 14K의 화이트 골드를 쓰고 있다
(조선일보, 1969년 3월13일자)

2) 경제 성장기(1971-1980)

1973년에 확정된 가정의례준칙에 의하면, 약혼식은 금할 것을 권장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약혼은 두사람의 호적등본과 건강 진단서를 첨부한 소정의 약혼서를 교환하는 것으로 끝내라고 하고 있으나, 약혼식을 하는 것은 법 정신에는 어긋나지만 처벌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이 당시 1975년도 조사(조선일보)에 따르면 여대생의 82.8%가 약혼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 당시의 약혼식에 대한 일반인들의 가치관을 뒷받침해 준다.

'힘없이, 청첩장 없이, 주례 없는' 3無 혼례식의 권장에 따라 혼례가 다소 검소하고 간략하게 되는 경향을 보여, 건전한 사회 기풍을 조성하는 효과를 거둔 점도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유명무실화되었다. 또한 양가에 예단을 교환하는 풍습이 일반화되어 '소박한 마음의 표시'를 넘어서는 경향을 보였으며 혼인식을 성대히 올리고 싶은 사람들이 가정의례 법을 피해 가정의례 법이 실행되기 전에 서둘러 혼인하기도 하였다.

신혼여행의 경우, 1970년대 초반에는 대부분의 경우 택시를 세내어 새로 생긴 남산 지하 터널이나 북악 스카이웨이를 한번 돌고 수안보온천으로 허니문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제주도 신혼여행은 도시 중산층 이상이나 꿈꾸었을 뿐 대부분은 아예 포기하거나 훗날 '구혼 여행'으로 계획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수의 경우, 1970년대에 급격한 경제 성장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가전제품이 다양화되면서 혼수 비용 부담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20만원짜리 전세방에 10만원짜리 장롱과 5만원짜리 화장대와 10만원짜리 TV세트가 놓이고 신부 손엔 20만원짜리 반지가, 신랑손엔 10만원짜리 금시계가 걸려 있다. 양가 합쳐 결혼 비용이 1백만원 정도 소비하였다.
(조선일보, 1971년 ,9월30일자)

3) 고도 성장기(1981-1990)

이시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약혼식의 풍습은 점차 사라져 가는 반면, 함 잽이 관행과 과다 혼수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신혼여행이 필수로 등장하였고, 야외 촬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관행이 생겼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함잽이 관행에서는 가까운 친지 중 다복하고 행복한 사람이 함을 메고 가며, 여자 집에서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돌아갈 때 노자에 보태 쓰라며 소액의 돈을 쥐어 주었다. 그러나 함진아비가 신랑의 친구로 바뀌면서 비용을 많이 요구하게 되었고 이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계층 상승 욕구가 증대됨에 따라 직업 중매인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이는 예단 및 혼수의 과다로 연결되었다. 또한 통행금지의 폐지와 함께 야간에 이루어지는 혼인도 시작되었으며, 혼인식장의 경우, 틀에 박힌 예식장에서 벗어나 평소에 즐기던 산이나 바다와 같이 장소가 다양해지면서 형식의 파괴가 나타났다.

혼인식의 경우는 급격한 부의 편중에 의해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혼례식이 호텔이나 대형 빌딩에서 거행되기도 했으나 반면, 민중 의식의 확대로 저렴한 비용으로 전통 혼례 의상을 착용한 민중 혼례식도 많이 생겨나면서 비용 적인 측면에서 이중성이 형성되었다.

신혼여행은 1970년대의 근거리 여행에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고, 88년 올림픽 이후 1989년 해외 여행자 유화로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속물적 결혼 풍속도, '마담 뚜'들의 행각을 살펴보면, 결혼이란 것이 이제는 갈수록 도박 행위와 흥정 행위를 닮아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조선일보, 1984년, 2월 21일)
혼인과 관련된 옛 풍습이 현대에 잘못 전달 돼 허례허식을 낳은 경우가 많아졌는데 시댁에 대한 과도한 예물과 예단이다.
(동아일보, 1988년 6월 23일)

4) 경제 안정기(1991년 이후 )

1980년대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약혼식과 함잽이 풍습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였거나 많이 사라지고 있으며, 신혼여행으로 해외 여행을 선호하고 야외 촬영이 혼례 절차의 일부분으로 행하여졌다.

신세대의 혼례 관행은 함을 안 팔거나 신랑이 직접 신부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으로 변하였다. 예물과 예단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특히 연애혼의 경우 예물의 종류가 감소하면서 예물 비용도 많이 절감되었으나, 중매혼의 경우에는 경기 상승에 따른 기대 심리의 상승으로 예물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비용도 증가하였다. 예단은 상류층을 제외한 중산층에서는 불필요한 물건을 무조건 구입하는 것보다는 현금으로 예단을 드리는 경향이 생기면서 신경은 덜 쓰게 되었으나 비용은 증가하게 되었다. 반면, 중상류 이상의 계층에서는 '시어머니 리스트'가 등장하여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켰고 예단은 중류 가정에 부담을 주는 요인이었다..

혼인식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계층 분화 현상을 보여 상류층에서는 혼인식과 피로연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에서 '가족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혼인식을 행하고, 중류층 가정에서는 피로연을 대신하여 실용적인 답례품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예식장의 횡포가 잦아지면서 예식장이 아닌 회사나 공공 기관의 강당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첩장을 받으면 경조비 지출과 관련하여 대부분 부담부터 느끼게 되었다.

해외 신혼여행이 일반화되면서 신혼 여행객의 50%정도가 해외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야외 촬영은 1990년대에는 보편화되어 혼례 비용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혼수품도 그 내용이 다양해지고 대형화되면서 비용도 증가하였다.

예식장의 횡포가 잦아지면서 주로 금융회사, 기업, 정부 기관인 이들 직장은 강당이나 회의실을 결혼식에 알맞게 꾸미고 폐백용품등 예식 도구를 갖춰놓고 미혼 사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일보, 1992년 9월 15일)

3) 서구식 혼례의 유입

1) 갑오경장 이후

갑오경장 이후 개화기를 거치면서 개항과 함께 서구의 문화와 개신교가 들어와 혼례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과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전통 혼례의 틀이 구식 혼례로 밀려나면서 이른바 신식 혼례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일본과 서구의 혼례 요소가 19세기 중반까지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부터 기독교의 전파와 더불어 서양식의 혼례가 시작되었으며, 기록에 의한 최신식 혼인은 1890년 정동 교회에서 올린 여신도 박신실과 남신도 강신성의 혼인식이었다(이효재, 1972).

이 시기에는 교육 기회의 확대로 인하여 지식층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신식 혼인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1907년 기독교식 혼례가 처음으로 공개된 이후, 기독교인들이 신식 혼례를 하기 시작했고, 불교계에서도 전통 혼례가 아닌 불교식 혼례를 창안하였다. 이에 따라 혼례의 장소도 신랑·신부집이 아닌 교회, 절, 학교 등으로 변하면서 혼례식의 유형도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이러한 신식 혼례는 전통 양식보다 간략한 절차, 간단한 의복, 적은 비용으로 치를 수 있었으므로 다수에 의해 환영을 받게 되었다.

2) 1920년대 - 1960년

1920년대에는 여인들의 쓰개치마가 없어지고 단발머리형이 나타났으며, 신식 혼례의 물품 대여 장소가 생겨났고 여기서 신부의 면사포와 신랑의 모닝코우트나 프록코트를 대여해 주었다. 또한 1930년대부터는 양장의 급속한 보급으로 인하여 신부 의상으로 웨딩드레스가 등장한다. 이시기는 전통 혼례복과 서양식 혼례복이 혼용된 과도기적 시기이다.(한상숙, 1984). 일제 통치 기간을 통하여 혼례 변천사에 있어서의 중요한 사건은 1934년 조선 총독부가 발표한<의례준칙>이다.

결과적으로 구식 혼례는 밀려나고 일본과 서구의 혼합인 신식 혼례가 거행되었다(박혜인, 1991).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오히려 고유한 민속 관행 속에 「가례」를 융합시켜 재래의 혼인 관행을 지속시켜 왔음을 알 수 있다(김영주, 1994).

1950년대에는 6.25 사변의 영향으로 평상복 차림의 혼례식이 있었으나 휴전 직후부터 신식 혼례식이 일반화되었고, 1950년대 말에는 예식장 및 미용실에서도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대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혼례복으로 신랑은 신사복이 등장하여 모닝코우트와 병용되었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의 여성 혼례복은 흰색의 한복 치마와 저고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4) 서구식 혼례의 일반화

우리 나라는 1960년대 이후 경제 개발로 인해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사회가 복잡, 다원화됨에 따라 혼례 절차나 규범이 실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 개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1969년 국가 시책으로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1973년 가정의례준칙이 확정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준칙은 유명무실화되었고 일부 계층에서는 탈법, 변칙으로 호화스런 혼례를 계속하였다.

1) 경제 도약기(1961-1970)

1960년을 전후로 하여 약혼식이 등장하였다. 약혼식이란 집안과 당사자간에 언약하는 것이므로 대외적으로 크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당사자에 따라 약혼식을 생략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생략하기가 섭섭하면 신부집에서 양가가 자리를 같이하는 정도로 끝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서양식 혼인이 일반화되면서 예물도 노리개나 금반지보다는 다이아몬드 같은 서구식 예물에 관심이 증대되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예식장을 이용하였으며 예식장에서 신부 화장과 드레스를 끼워서 서비스하는 행태도 이때가 시초였다. 예식장에서 혼인을 하면서 폐백도 시댁이 아닌 예식장에서 간단하게 행해지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는 과거의 관행을 변화시켰다기보다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장소만 변경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즈음 결혼 선물이라면 의레 생각하는 것이 '다이아먼드'. 가격을 살펴보면 가장 많이 쓰이는 3부짜리가 7만 9천원, 3.5부가 8만 8천원, 링은 대부분이 14K의 화이트 골드를 쓰고 있다
(조선일보, 1969년 3월13일자)


2) 경제 성장기(1971-1980)

1973년에 확정된 가정의례준칙에 의하면, 약혼식은 금할 것을 권장 사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약혼은 두사람의 호적등본과 건강 진단서를 첨부한 소정의 약혼서를 교환하는 것으로 끝내라고 하고 있으나, 약혼식을 하는 것은 법 정신에는 어긋나지만 처벌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이 당시 1975년도 조사(조선일보)에 따르면 여대생의 82.8%가 약혼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나 당시의 약혼식에 대한 일반인들의 가치관을 뒷받침해 준다.

'힘없이, 청첩장 없이, 주례 없는' 3無 혼례식의 권장에 따라 혼례가 다소 검소하고 간략하게 되는 경향을 보여, 건전한 사회 기풍을 조성하는 효과를 거둔 점도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유명무실화되었다. 또한 양가에 예단을 교환하는 풍습이 일반화되어 '소박한 마음의 표시'를 넘어서는 경향을 보였으며 혼인식을 성대히 올리고 싶은 사람들이 가정의례 법을 피해 가정의례 법이 실행되기 전에 서둘러 혼인하기도 하였다.

신혼여행의 경우, 1970년대 초반에는 대부분의 경우 택시를 세내어 새로 생긴 남산 지하 터널이나 북악 스카이웨이를 한번 돌고 수안보온천으로 허니문을 떠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제주도 신혼여행은 도시 중산층 이상이나 꿈꾸었을 뿐 대부분은 아예 포기하거나 훗날 '구혼 여행'으로 계획하는 경우가 많았다.

혼수의 경우, 1970년대에 급격한 경제 성장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가전제품이 다양화되면서 혼수 비용 부담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20만원짜리 전세방에 10만원짜리 장롱과 5만원짜리 화장대와 10만원짜리 TV세트가 놓이고 신부 손엔 20만원짜리 반지가, 신랑손엔 10만원짜리 금시계가 걸려 있다. 양가 합쳐 결혼 비용이 1백만원 정도 소비하였다.
(조선일보, 1971년 ,9월30일자)


3) 고도 성장기(1981-1990)

이시기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약혼식의 풍습은 점차 사라져 가는 반면, 함 잽이 관행과 과다 혼수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신혼여행이 필수로 등장하였고, 야외 촬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관행이 생겼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함잽이 관행에서는 가까운 친지 중 다복하고 행복한 사람이 함을 메고 가며, 여자 집에서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돌아갈 때 노자에 보태 쓰라며 소액의 돈을 쥐어 주었다. 그러나 함진아비가 신랑의 친구로 바뀌면서 비용을 많이 요구하게 되었고 이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계층 상승 욕구가 증대됨에 따라 직업 중매인의 역할이 증대되었고 이는 예단 및 혼수의 과다로 연결되었다. 또한 통행금지의 폐지와 함께 야간에 이루어지는 혼인도 시작되었으며, 혼인식장의 경우, 틀에 박힌 예식장에서 벗어나 평소에 즐기던 산이나 바다와 같이 장소가 다양해지면서 형식의 파괴가 나타났다.

혼인식의 경우는 급격한 부의 편중에 의해 상류계층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혼례식이 호텔이나 대형 빌딩에서 거행되기도 했으나 반면, 민중 의식의 확대로 저렴한 비용으로 전통 혼례 의상을 착용한 민중 혼례식도 많이 생겨나면서 비용 적인 측면에서 이중성이 형성되었다.

신혼여행은 1970년대의 근거리 여행에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고, 88년 올림픽 이후 1989년 해외 여행자 유화로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속물적 결혼 풍속도, '마담 뚜'들의 행각을 살펴보면, 결혼이란 것이 이제는 갈수록 도박 행위와 흥정 행위를 닮아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조선일보, 1984년, 2월 21일)
혼인과 관련된 옛 풍습이 현대에 잘못 전달 돼 허례허식을 낳은 경우가 많아졌는데 시댁에 대한 과도한 예물과 예단이다.
(동아일보, 1988년 6월 23일)


4) 경제 안정기(1991년 이후 )

1980년대부터 사라지기 시작한 약혼식과 함잽이 풍습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였거나 많이 사라지고 있으며, 신혼여행으로 해외 여행을 선호하고 야외 촬영이 혼례 절차의 일부분으로 행하여졌다.

신세대의 혼례 관행은 함을 안 팔거나 신랑이 직접 신부집으로 가지고 가는 것으로 변하였다. 예물과 예단도 변화가 나타났는데 특히 연애혼의 경우 예물의 종류가 감소하면서 예물 비용도 많이 절감되었으나, 중매혼의 경우에는 경기 상승에 따른 기대 심리의 상승으로 예물의 종류도 다양해졌고 비용도 증가하였다. 예단은 상류층을 제외한 중산층에서는 불필요한 물건을 무조건 구입하는 것보다는 현금으로 예단을 드리는 경향이 생기면서 신경은 덜 쓰게 되었으나 비용은 증가하게 되었다. 반면, 중상류 이상의 계층에서는 '시어머니 리스트'가 등장하여 사회적인 문제를 야기시켰고 예단은 중류 가정에 부담을 주는 요인이었다..

혼인식도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계층 분화 현상을 보여 상류층에서는 혼인식과 피로연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에서 '가족 모임'이라는 명목으로 혼인식을 행하고, 중류층 가정에서는 피로연을 대신하여 실용적인 답례품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예식장의 횡포가 잦아지면서 예식장이 아닌 회사나 공공 기관의 강당을 이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청첩장을 받으면 경조비 지출과 관련하여 대부분 부담부터 느끼게 되었다.

해외 신혼여행이 일반화되면서 신혼 여행객의 50%정도가 해외로 신혼여행을 다녀왔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야외 촬영은 1990년대에는 보편화되어 혼례 비용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혼수품도 그 내용이 다양해지고 대형화되면서 비용도 증가하였다.
예식장의 횡포가 잦아지면서 주로 금융회사, 기업, 정부 기관인 이들 직장은 강당이나 회의실을 결혼식에 알맞게 꾸미고 폐백용품등 예식 도구를 갖춰놓고 미혼 사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일보, 1992년 9월 15일)

1) 혼례와 혼인의 의미
혼례는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데 따르는 의식 절차를 정한 것이다. 婚禮는 한자 표기가 昏(저물혼)禮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혼인 예식을 해가 저무는 시간에 올리는 예라는 뜻을 갖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혼인하는 것은 양과 음의 만남이므로 그 시간도 양과 음이 교차하는 시간인 해가 저무는 때가 합당하다는데서 유래하였다.(김득중, 1999) ☞ 최근에 혼인 예식을 주중의 저녁 시간에 하는 사례는 혼인에 있어서 음양의 조화를 꾀함과 동시에 주말 혼인 예식장 주변의 교통 혼잡을 피할 수 있어 바람직하다
혼인은 여자와 남자가 만나 서로 부부가 되어 일평생 고락을 같이 하는 인격적 결합으로서 婚은 '장가든다'는 뜻이고 姻은 '시집간다'는 의미이므로 장가들고 시집간다는 뜻이 된다.
☞ 현재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결혼이라는 말은 혼인 절차에 대한 명칭들이 남자 위주로 되면서 장가든다는 의미만 담겨 있다. 이는 남녀 평등한 결합 의도에 합당치 않으므로 혼인으로 바꾸는 것이 옳다.
2) 혼인의 정신
우리 나라 전통 혼례의 기본 정신에는 삼서 정신과 평등 정신이 있다. 전통 혼례 의식에는 신랑과 신부가 혼인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부모에게 서약하는 誓父母, 하늘과 땅에 서약하는 誓天地, 서로가 배우자에게 서약하는 誓配偶 의식이 있다. 誓父母는 자기를 있게 한 조상과 부모에게 큰 은혜를 기리는 것이고 誓天地,는 혼인이 천지의 음양 이치, 즉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으로 경천 애지 사상과도 직결되며 하늘과 땅을 두고 부부의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다. 誓配偶는 남편과 아내로서 상대방에게 도리를 다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다.
☞ 신랑 신부가 예식을 거행하기 전에 자신을 낳아 키우고 교육시켜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부모님 앞에 절하고 부모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좋은 가정을 이루겠다고 서약하는 의식은 매우 뜻깊은 것으로 현대의 신랑 신부에게 권장하여야 할 절차이다.
전통 혼례에 의하면 혼인이란 남녀가 몸을 합하는데 참 뜻이 있는데 혼인의 의미가 장가가고 시집간다는 평등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부부는 서로 존중하여 공경하는 말씨로 대화하며, 호칭도 대인칭이 아닌 거처칭이고 남편이 출세하면 아내도 함께 작위가 올랐다.(김득중, 1999)
3)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전통 혼례의 절차
현대에 이루어지고 있는 전통 혼례의 절차를 준비 의례, 대례, 대례후의례로 구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준비의례 대례 대례 후 의례
 
혼담
사주보내기
택일
함 보내기
  초자(녀)례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폐 백
근 친
 

1) 준비 의례
혼담 : 아들과 딸을 낳아 장성하게 되면 부모들은 마땅한 짝을 구해 부부가 되게 함으로써 인간이 도리를 다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합당한 대상자를 찾아 부모끼리 서로 혼인할 의사를 타진하며 청혼하고 허혼하는데 이 과정이 혼담이다. 주로 남자 측에서 중매인을 통하여 청혼을 하게 되는데 중매인은 비교적 나이가 지긋하고 서로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주 보내기 : 사주는 중매인을 통하여 혼인하기로 결심한 뒤 처음 보내는 서신으로 신랑의 생년, 생월, 생일, 생시를 干支로 적고 그것을 다섯 번 접어 봉투에 넣는다. 봉투 전면에는 '四柱'라 쓰고, 후면에는 '謹封'이라고 쓴다. 신랑의 사주를 신부 측에 보내는 까닭은 남녀간의 궁합을 보는 것을 신부 측에 맡기고 또 혼인 날짜를 전하는데 참고하라 는 의미가 잇다. 사주를 받는다는 것은 현대적인 의미로는 약혼에 해당한다.
택일 : 연길(涓吉)이라고도 하며 여자 측이 남자의 사주를 받고 나서 여자 측의 사정에 맞게 좋은 날짜를 가려 혼례 일을 정해 남자 측에 보내는 절차이다.
납폐(함보내기) : 함보내기는 신랑 댁에서 신부 댁에 혼약이 완전히 성사된 데 대하여 감사하는 표시로 예물과 혼인 문서인 혼서지를 함에 넣어 보내는 것이다. 함은 일반적으로 혼레전날에 신랑 일가에서 아들을 낳고 금실이 좋은 사람이 지었다.
2) 대 례
초자례 / 초녀례 : 초자례(醮子禮), 초녀레(醮女禮)는 혼인 당사자가 혼인함에 있어서 조상과 부모의 은덕을 기리며 서약하는 서부모례(誓父母禮)를 말한다. 신랑이 장가들기 위해 자기 집을 떠날 때 조상에게 고하고 부모의 교훈을 받으며 또한 부모에게 떳떳한 지아비의 역할을 다 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 초자례이고, 신부가 자기 조상과 부모에게 지어미로서 역할을 다할 것을 선언하는 것은 초녀례이다.
전안례 : 전안례(奠雁禮)란 신랑이 신부집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행하는 의례로 신부의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례이다. 기러기는 자손이 창성하고 정절을 지키는 새를 상징하므로 남편이 될 신랑이 아내가 될 신부에게 평생을 함께 하겠다고 맹세하는 증표로 기러기를 드리는 것이다.
교배례 : 전안례가 끝난 후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마주 서서 상대방에게 절을 하며 백년해로 할 것을 서약하는 의식이다. 신랑은 대례상 앞으로 안내되어 동쪽에서 서향하여 선다. 신부는 수모의 부축을 받으며 서쪽에서 동향하여 선다. 신부가 남쪽을 향하여 큰 정을 두 번 하면 신랑이 한 번 절한다. 신부가 다시 두 번 절하면 신랑은 한 번 절한다.
합근례 : 합근례(合 禮)란 신랑과 신부가 술잔을 나누어 마시는 의식으로 백년가약을 맺는 서약의 뜻과 기쁨을 같이 하는 合歡의 뜻이 있다. 석잔의 술을 교환하여 마시는데 이는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는 것과 부부의 화합을 의미한다.
3) 대례 후 의례
폐백 : 혼례식을 마친 후 신부가 신랑집에서 시부모와 시댁 친척들에게 첫인사를 올리는 의식으로 현구례(見舅禮)라고도 한다. 신부가 준비해 가는 폐백 음식은 시아버지에게는 대추, 시어머니에게는 편포나 육포를 상에 올린다. 시부모는 신부의 절을 받은 후 시아버지는 대추를 내리고 시어머니는 육포를 어루만지면서 시부모 바로 섬기는 도리, 형제, 친척 화목 하는 도리, 자식 올바르게 키워 가르는 도리등의 덕담을 한다.
최근에 시부모나 친척들이 폐백을 받고 나서 절 값이라며 돈 봉투를 내리는 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남상민, 1998) .
근친 :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간 후 처음으로 친정에 가서 부모가 뵙는 것을 근친이라고 하고 신랑이 처가에 가는 것을 재행이라고 한다. 시부모는 며느리가 친정 부모에게 드릴 술, 과일, 음식 등을 준비하여 보낸다.
1) 약혼

1. 실 태
- 약혼식은 한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축소되어가고 있다. 실제로 한국가정생활개선진흥회 (이하 가선회)에서 1997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혼인한지 5년 이내의 여성가운데 32% 정도만이 약혼식을 하였으며 이들 중 25%만이 약혼식이 필요하다고하였다. 즉 약혼식은 점차 사라져 가는 추세이다.
- 약혼을 하는 사람들도 약혼식이 필요한 이유로 대부분 양가가족이 인사를 하기 위한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약혼식의 기능이 허례적인 목적보다는 실질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 문제점 및 대안

- 약혼은 체면유지나 과시행동의 수단이 돼서는 안된다.
- 약혼은 당사자와 부모 등 직계가족만이 참석하여 양가의 상견례를 하고 혼인의 제반사 항을 협의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함

1. 실태
- 함들이 실행률은 1998년에 61%로 1997년의 71%에 비해 감소하는 추세이다. 함값도 평균 60만원 에서 47만원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평균 함값이 100만원 (1997)이고 200만원 300만원이 들었다는 사례도 나타나 상류층의 함값이 매우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가정생활개선진흥회,1997).
- 대부분의 사람들이 함들이 행사에서 함값 부분이 가장 근절되어야 하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어 함값이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문제점

- 함들이기 행사는 그 동안 함값, 함들이 행사에서의 추태 등 사회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뿐만 아니라 함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호화, 사치 예물등을 담아야 하고 이를 주변사람에게 자랑 하는 행사로 변하였다. 이렇듯 과시적이고 과소비적인 함들이행사는 양가에 큰 부담이 될 뿐더러 이에 참석한 사람들도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가 허다하다.
- 전통적으로는 사주보내기라고 하여 사주는 손없은 날을 택해 중매인을 보내거나 동네 사람 중 첫아들을 낳고 깨끗하고 좋은 사람을 골라 청혼서와 함께 보내는 의식으로 본래는 사주만 보냈다. 지나친 함의 내용물이나 함들이 행사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다.

3. 대안

- 이러한 병폐를 없애기 위해서는 함은 원칙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부득이 한 경우 신랑 집에서 신부집으로 직접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함에는 혼서지와 더불어 기본적인 것만을 넣고 9가지가 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신혼살림

1. 실 태
- 갓 혼인한 부부의 집을 방문할 때나 40대 부부의 집을 방문할 때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모든 가구, 집기, 가전제품이 1달 살림한 집이나 10년 살림한 집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혼인할 때 완벽한 신혼살림을 장만하는 관행 때문이다.
- 뿐만 아니라 무조건 새것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무조건 새것이고 최신형이여야 하고 또한 큰 것을 선호한다. 이럴 경우 조그마한 집에 엄청난 살림살이가 들어가야 하므로 공간적 으로 쾌적하고 넉넉한 살림을 하기 어렵다.
- 소비자보호원의 조사에 따르면 살림마련에 드는 비용이 평균 9백 23만원이었으며 한국가정생활 개선진흥회의 조사결과 혼인한지 5년 이내 여성들이 혼인비용 중에 가장 부담스러운 항목으로 신혼살림용품마련을 든 것은 이 항목이 혼인비용가운데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보다 절약하면 신혼주거 마련이라든지, 비상금 마련 등 보다 효과적인 쓰임이 있을 수 있다.

2. 문제점 및 대안

- 신혼살림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쓰고 꼭 필요한 것만 구입하도록 한다. 또한 최적의 용량의 가구,가전제품만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예물

1. 실 태
- 예물은 과시적인 혼수품목이고 예비 신랑 신부들도 모두 과다한 예물을 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 소비자보호원 조사에 의하면(1997) 예물로만 신랑 신부 모두 합해서 무려 7백 33만원을 들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10명중 6명 시상이 신랑 신부에게 각각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지만 '이를 불필 요한 예물'로 인식하는 이가 응답자의 70%나 돼 개선 여지가 매우 크다.

2. 문제점 및 대안

- 이러한 사치적인 혼례에 대한 기대는 중산층 이상의 미혼남녀에게서 두르러지게 나타나 경제능력 이 없는 이들의 허영심과 이기심을 보여준다.
- 예물은 예비부부가 됨을 표하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의식이 하루 빨리 정착되어야 한다. 따라서 예물은 간단한 지환(指環)만을 교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5) 예단

1. 실 태
- 예단은 혼인당사자 가운데 신부 측에서 가장 고심하는 부분이다. 소비자보호원의 조사(1997)에 의하면 예단으로 7백 15만원을 소비하고 있다.
- 미국의 경우 예단은 없고 일본은 예단으로 시계(7만 5천원 상당) 정도만을 한다고 한 다. 이에 비하면 국민복지 수준이 훨씬 낮은 우리나라에서 예단에 지나친 비용을 들이는 것은 예의를 중요시하는 풍습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사치적이고 낭비적이다.

2. 문제점

- '예단만은 신경써서 시집보내겠다'라는 신부측 부모님이 매우 많다. 이것은 딸자식에 대한 부모님 의 과잉보호이자 자신감 부족이다. 오히려 예단을 지나치게 하기보다는 자식에 대한 교육투자가 더 긍정적이다.
- 예단의 많고 적음이 신랑부모에 대한 예우의 척도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또한 예단의 많고 적음이 예비신랑의 직업과 능력, 혹은 신랑측 집안의 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예단이 마음과 예의를 표하는 도구가 아니라 혼인당사자와 그 집안을 뽐내려는 과시욕에 불과하다.

3. 대 안

- 현재 예단은 상대방 부모와 신랑의 형제 자매, 그리고 부모의 형제 자매에 까지 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방 부모에게만 하면 좋겠다'라고 희망하고 있다.
- 예단의 범위는 당사자 부모로까지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6) 예식장

1 . 실 태
- 예비신랑 신부가 예상한 이상으로 과도한 혼례식 비용이 드는 이유는 혼례용품을 한 세트로 만들어 강매하는 상업적인 예식장의 횡포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비 신랑신부들은 상업적인 예식장을 이용한다. 혼례 장소에 대한 정보를 많이 찾아보면 저렴하고 교통이 편리한 공공기관이 많이 있다. 보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2. 문제점

- 혼례식 시간이 봄 가을의 주말 점심시간 전후로 집중되다보니 하객들에게도 겹치기 방 문이 빈번 하고 이런 이유로 혼인식 참석이 요식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또한 사회적으로 교통체증 등 많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다. 혼례식 시간은 평일 오후를 권장하되, 일몰시간이나 오후 3시 이후로 하여 '昏'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도 바람직하다.

3. 대 안

- 예식장소는 무료인 공공기관 종교기관 등을 이용하고 이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실비예식장을 이용하는 것이 실리적이다. 또한 지나치게 복잡한 주말을 피하고 평일이나 야간에 예식을 한다면 보다 조용하고 뜻깊은 혼례식을 할 수 있다.


7) 예복

1 . 실 태
- 예복은 약혼복(약혼을 하는 경우), 웨딩드레스, 피로연 예복, 폐백복, 신혼여행 갈때 입는 예복 등 각종 행사 때마다 새로운 예복을 마련하는 것이 유행입니다. 이 또한 필요이상의 사치이다. 더욱이 이들 예복이 한결같이 평상복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 특징이다.

2. 문제점 및 대안

- 피로연 예복이나 신혼여행 때 입는 예복은 물론 웨딩드레스도 예식후에 활용할 수 있는 정장으로 마련합시다. 한벌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예복들을 혼인식 당일만 활용하는 것은 매우 후회스러운 일이다.
- 대한주부클럽연합회 등에서는 예식후에도 입을 수 있는 정장 스타일의 예복을 소개하고 있다.


8) 하객초청

1 . 실 태
- 혼례식에 사람이 많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하고 고민한다. 혼례식이 북적되어야 혼인당 사자 가족 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인간성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많은 하객을 초청하기도 한다.
2. 문제점 및 대안
- 이러한 행태에 최고, 최대만을 좋아하고 내실보다는 외형만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과장 적인 모습 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남의 눈과 말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체면문화가 문제이다.
- 또한 하객중 절반 이상이 예식에는 관심없이 축의 금만 내거나 아예 피로연장으로 직행, 우리의 결혼문환는 갈수록 일그러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행태를 비난하면서도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생각에 많은 하객을 초청하고 있다.
- 하객초청은 신랑, 신부측 각각 100명 이내로 축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9) 피로연

1. 실 태
- 혼인식 가운데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이 피로연인데 피로연 비용으로 평균 3백 50만원을 쓴다 (소비자보호원 ,1997).
- 이렇게 소비적인 피로연은 너무나 상업적인 음식마련과 짧은 시간으로 인해 하객들도 고마운 마음 이나 여유를 가지고 식사를 즐기지 못하는 실정이다.

2. 문제점 및 대안

- 단지 형식적인 대접이 않되기 위해서 피로연은 가족중심으로 하는 것이 권장할 만 합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오신 하객들께는 식사를 대접할 수 있다.
- 최소한의 하객만을 초청하여 형식적인 식사대접이 아닌 단촐하면서도 정감있는 피로연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10) 축의금
1. 실 태
- 혼인식 가운데 가장 비용이 많이 드는 부분이 피로연인데 피로연 비용으로 평균 3백 50만원을 쓴다 (소비자보호원 ,1997).
- 이렇게 소비적인 피로연은 너무나 상업적인 음식마련과 짧은 시간으로 인해 하객들도 고마운 마음 이나 여유를 가지고 식사를 즐기지 못하는 실정이다.

2. 문제점 및 대안

- 단지 형식적인 대접이 않되기 위해서 피로연은 가족중심으로 하는 것이 권장할 만 합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오신 하객들께는 식사를 대접할 수 있다.
- 최소한의 하객만을 초청하여 형식적인 식사대접이 아닌 단촐하면서도 정감있는 피로연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11) 폐백

1 . 실 태
- 폐백은 혼인식 당일이나 시댁식구에게 인사드리는 매우 형식적인 절차로 치루어졌다.

2. 문제점 및 대안

- 폐백식에서의 폐백음식과 폐백옷, 그리고 폐백절차, 각종 팁 등은 상업주의가 낳은 과 소비 그 자체이다.
- 진정한 의미의 폐백을 위해서 폐백은 신혼여행 후 간소한 가족모임으로 하여 인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2) 신혼여행

1 . 실 태
- 신혼여행비로 평균 1백 88만원의 필요이상의 비용을 쓰고 있다. 이러한 비용은 대부분의 젊은이 들이 신혼여행지로 해외여행을 선호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증가할 것이다.
2. 문제점 및 대안
- 신혼여행은 모든 예비신랑 신부에게 가장 소중한 꿈이다. 그러나 많은 신혼부부들이 남들이 하는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만의 신혼여행이 아닌 남들이 꾸며 놓은 신혼여행 상업주의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 신혼여행지는 둘만의 시간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장소로 선택하기 위해 검소하고 합리적인 국내 의 장소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신혼여행의 일정도 일반 여행사나 상업주의에 휘말리지 말고 둘만의 건강상태와 경제적인 상태 그리고 관심에 맞게 일정을 각자 선택하도록 안다. 이를 위해서는 사전에 정보 탐색이 필수적이다.


13) 식순

- 혼인식순은 혼인서약, 성혼선언문 낭독, 주례사 등 그 순서보다는 이러한 혼인식 과정 에서 혼인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는 상징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 혼인식순 가운데 혼인서약서에 예비신랑 신부가 사인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원하는 경우에 간단한 지환을 교환하는 것도 혼인의 상징으로 바람직하다.

1) 기본원칙

- '내 결혼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을 항상 명심한다. 혼례비용 및 절차를 부모에게 의존 하지 말고 혼례당사자 스스로 결정한다.
- 주변사람들의 말이나 혼례 행태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여 주체성을 가지자.
- 자신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맞추어 혼인절차 및 비용을 정하여 과소비를 하지 않는다.
- 자신의 혼례행위가 타인과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가를 인식한다.

2) 혼례지침

① 물질보다 정신을 강조한다.
② 준비원칙을 세우고 그에 따른 계획과 표준을 지킨다.
③ 약혼식은 별도로 진행하지 않았다.
④ 함들이는 생략하거나 조용히 가져오는 것으로 하였다.
⑤ 예단은 생략하거나 간소하게 하였다. - 시댁의 결심 중요
⑥ 예물은 간소하지만 의미있는 것으로 장만하였다.
⑦ 하객은 진정으로 축하할 수 있는 범위로 축소하여 초청하였다.
⑧ 축의금은 대다수 받지 않았다.
⑨ 상업적 혼례문화를 피한다.
⑩ 혼인당사자의 앞날에 스스로 행복을 가꾸며 살기를 기원한다.
⑪ 혼인식 당일 웃음꽃이 피어나는 축제로 만듦.

3) 건전한 혼례절차와 내용

여러 시민단체는 우리사회의 왜곡되어 있는 혼례문화를 개선하고자 현재의 상황에서 전통적인 혼례의 의미와 현대적인 혼례문화의 요구를 반영하는 혼례모형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혼례절차의 모형을 제시하였는데 현재 혼례절차에서 구체적인 기준이 없어서 적절하며 예의에 벗어나지 않은 혼례행위와 혼수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일반인에게 좋은 길잡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제시한 혼례모형은 혼례의 전문가들이 전통적 의미와 현대적 관행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정한 기준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결혼에 대한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을 할 때 합리적인 기준이 될 것이다.

다음의 혼례모형에서 보면 불필요한 혼례절차인 약혼식, 함들이 등은 안해도 좋으나 필요한 상황에서는 그 본래의 취지나 목적을 충분히 살리도록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더우기 약혼식이나 함들이 행사를 할 때 양가의 직계가 인사하는 등 상견례의 행사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예단이나 예물, 신혼살림 등에 허식적인 요소와 체면의식이 많이 작용하므로 보다 실용주의적인 예식이 되도록 모형을 제안하였다.

또한 하객초청이나 예식장소 그리고 피로연, 축의금 등은 혼례가 가지는 사회문화적인 요소들을 나타낸다. 따라서 양가의 勢과시로 인한 허례적인 측면이 많고 한편으로는 상업적인 예식장 문화로 인한 획일적인 혼례문화를 양산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제시한 혼례모형은 혼례문화의 거품을 빼고 본래의 의미를 부활시키는 혼례잔치를 제안하고 있다. 따라서 양가의 하객초청은 가장 가깝고 진정으로 축복해 주는 하객들만 초청하여 과도한 축의금을 받지 않고 함께 축복하고 즐길 수 있는 분위기를 지향한다.

신혼여행 등은 극히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이므로 사회일반적인 모형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획일화된 여행 스케줄에 자신의 스케줄을 맞춘다든지, 지나치게 호화로운 해외여행만을 지향하는 문화는 분명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평소 취미나 선호에 따라 자유롭고 의미가 남는 선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결혼식이 수천만원을 들이면서 개성없고 아무런 의미없는 통과절차정도로만 할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자신에게 유익하고 추억이 있는 개성있는 결혼식으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양가의 어른인지 아니면 화려한 결혼식인지, 아니면 알찬 신혼집과 살림살이인지, 자신의 상황을 우선 직시하고 자신의 취향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4) 건전한 혼례모형
구분 내용

약혼 약혼식은 생략하고 사주와 간단한 약혼예물을 보낸다. 꼭 필요한 경우가 있다면 양가 부모 형제 상견례정도로 한다.
함 함은 원칙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부득이 한 경우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직접 전달한다. 그리고 함에는 혼서지와 더불어 기본적인 것만을 넣는다.
신혼살림 신혼살림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쓰고 꼭 필요한 것만 구입하도록 합니다. 또한 최적의 용량의 가구 가전제품만을 마련한다.
예물 예물은 간단한 지환(指環)만을 교환한다. 젊은이들의 예물에 대한 이기적인 의미부여가 문제. 지나친 보석류를 지향하고 여유가 있다면 보다 실용적인 선택(주택비용)을 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단 예단의 범위는 당사자 부모로만 제한하고 가까운 친척에게는 정표정도로 한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는 의류 한 벌, 친척에게는 양말 한 세트 정도로 한다.
예식장소 예식장소는 무료인 공공기관 종교기관 등을 이용하고 이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실비예식장을 이용한다. 지나치게 복잡한 주말을 피하고 평일에 예식을 하도록 한다.
예복 피로연 예복이나 신혼여행 때 입는 예복, 한복 등 다양한 예복의 수를 줄이고 웨딩드레스도 예식 후에 활용할 수 있는 정장으로 마련한다.
하객초정 하객초청은 꼭 참석할 분에게만 하며 참석여부를 확인하여 신랑, 신부측 각각 100명 정도로 축소한다.
피로연 하객에게는 가능하면 답례품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식사시간과 혼례식 시간이 겹칠 때만 피로연을 한다.
축의금 축의금은 최소한으로 하도록 하여 거품을 뺀다(일반적으로 가까운 친지는 2-3만원). 특히 공무원 및 국회의원 고위관리직 기업주 등 사회지도층인사들은 축의금을 받지 않도록 한다.
폐백 폐백은 신혼여행 후 신랑집에서 간소한 가족모임으로 하여 인사를 하는 것이 좋다.폐백음식은 전통의식대로 밤과 대추, 육포(편포 혹은 닭), 구절판, 술을 준비한다.
신혼여행 신혼여행지는 검소하고 합리적인 국내의 장소로 정한다.
이바지 음식 이바지 음식은 양가의 합의에 의하여 생략하는 경우가 많이 증가하였으므로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부득이한 경우 간단히 손수 준비하는 것이 이바지 음식의 본래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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